이달 초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2022 소부장뿌리 기술대전>에서는 전시관 입구에 ‘소부장·뿌리 경쟁력 강화 3년의 기록’이란 이름의 테마관이 설치돼 눈길을 끌었습니다. 여기서 ‘3년’이란 일본의 소부장 수출 금지 조치 이후 우리나라 기업들이 소부장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력해온 ‘기간’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극일(克日)의 시간이었던 셈이죠.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소부장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선 우리의 경쟁 상대인 일본의 경쟁력을 먼저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CAPA가 소개해 드릴 <포스트 한일경제전쟁>(문준선 저)은 부제가 알려주듯 ‘일본 소부장 경쟁력의 원천을 찾아’ 나선 책입니다. 일본과의 소부장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필독서라 할 수 있죠.
‘소부장’이란 소재·부품·장비를 가리키는 말로 소재·부품은 상품의 제조에 사용되는 원재료나 중간생산물을, 장비는 소재나 부품을 생산하거나 소재·부품을 사용해 제품을 생산하는 장치나 설비를 말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제품에 들어가는 중간 제품이나 이런 중간 제품을 만들어내는 장비를 통틀어 ‘소부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소부장’이란 용어가 세간에 회자되기 시작한 건 지난 2019년 7월 일본 정부가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 등 반도체 생산의 핵심 부품인 소부장 3개 품목에 대한 대한민국 수출을 규제한 조치 덕분(?)입니다. 당시 일본의 갑작스러운 규제에 대한 반작용으로 국내에서 일본산 맥주 불매운동 등 반일정서가 확산되면서 한일 관계가 냉각기에 접어들었죠.
우리나라는 비록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제조 등의 분야에서 일본을 따돌리고 세계를 선도하는 위치에 올랐지만 막상 이를 생산하기 위해선 원료나 부품에 해당하는 소부장 품목 상당수를 여전히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야 합니다.
실제로 포토레지스트의 경우 일본의 수출 규제 이전까지 전체 수입량의 90% 이상을 일본에 의지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는 국내에서 ‘소부장’ 산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고조시키고 우리 경제의 대일본 의존도에 대한 위험성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소부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정작 국내에서 일본 경제에 대한 연구는 비주류로 밀려난 터라 소부장에 대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입니다. 그 중에서도 소부장 산업은 학계에서도 ‘비주류 중에 비주류’로 취급돼 관련 연구가 불모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본의 차세대 핵심 경쟁력인 소부장 산업을 본격적으로 조망한, 국내에서 좀처럼 찾기 힘든 소중한 저작입니다. 특히 저자(문준선 산업통상자원부 원전수출지원과장)는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뒤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한 현직 공무원입니다. 입직 후 산업부에서 근무하며 줄곧 소부장과 관련한 정책 실무를 담당해 온 대한민국 최고의 소부장 전문가입니다.
저자는 일본 내 소부장 관련 기업 460여 곳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서적이나 논문 같은 2차 저작물보다 경영자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듣기 위해 사사(社史)나 인터뷰, 협회 동정기사 등을 주요 자료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책에서 소개한 다양한 기업의 사례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곁들여져 딱딱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읽힙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책에선 어떤 내용들을 다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일본은 자타가 공인하는 제조업 강국입니다. 일본이 제조업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로 보통 전쟁과 장인 정신, 장수기업의 존재 등을 거론하곤 합니다. 소부장 강국으로서의 일본 또한 이러한 전통 위에 세워졌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같은 요인 외에 일본 사회의 또 다른 특성에 주목했습니다. 즉,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 경제가 갖게 된 ‘역동성’, 남극탐험과 우주개발 등 거대 과학 프로젝트에 도전하면서 쌓은 ‘전문성’, ‘비주류’ 기업들의 혁신 노력 등을 꼽았습니다.
일본의 소부장 경쟁력이 장인 정신이나 장수기업의 존재 등에 기인한다고 보는 기존의 시각으로는 일본과 다른 역사, 경제적 배경을 갖는 나라들은 일본과 같은 발전을 이루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또한 ‘잃어버린 20년’으로도 불리는 1990년대 이후 일본 제조업의 침체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저자는 “1990년대 이후 일본 제조업의 침체에는 군수산업에 대한 투자 미흡, 장인정신의 후퇴, 장수기업의 소멸 때문이 아니라, 일본 경제사회가 역동성보다는 안정성을 선택하고, 도전보다는 안정을 선호하며, 비주류들이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일본의 주요 소부장 기업 상당수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탄생했습니다. 90%가 넘는 세계시장 점유율을 보이는 자동차 배기가스 측정장비업체 ‘호리바제작소’, 원자 단위 관찰이 가능한 전자현미경 업체인 ‘일본전자’, NASA(미 항공우주국)에 카메라 부품을 납품하는 ‘미타카광기’ 같은 기업들이 대표적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그동안 전쟁이란 대의에 볼모로 잡혀있던 사람과 기술, 물자가 민간으로 대거 방출됐고, 이는 일본 사회를 전에 없던 역동적인 사회로 변모시켰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전쟁 이전엔 별다른 차별점이 없던 기업들이 기술력을 바탕으로 차별화에 나서면서 다수의 소부장 강소기업들이 탄생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입니다.
일본 소부장 기업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게 된 데에는 남극탐험, 우주개발, 천체 관측 같은 거대과학 프로젝트에 도전해온 역사가 버티고 있습니다.
일본은 1957년 남극에 쇼와기지를 건설했습니다. 일본의 남극 탐험 과정엔 혹한의 환경을 견딜 조립식 주택, 풍력발전기, 대형 설상차 개발 등에 소부장 관련 기업들이 참여했습니다.
또한 솥이나 밸브 등을 만들던 회사들은 우주선에 사용되는 부품 개발 업체로 거듭났습니다. 한때 도산 직전의 철공소였던 ‘유키정밀’은 우주 개발에 사용되는 부품을 만드는 업체로 거듭났습니다. 이 같은 반전 성공 스토리가 ‘시타마치 로켓’이란 TV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
일본 내에서 소부장을 이끈 것은 소니, 도요타 같은 유수의 대기업이 아닌, 이름 모를 중소업체들입니다. 이들은 일본 사회의 비주류였지만 “기존 주류들이 나태하게 현실에 안주하고 있을 때 신선함과 추진력, 활동성을 무기로 주류를 밀어내며 혁신을 이끌었"습니다. 이들이 일본의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주류로 부상하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입니다.
이러한 비주류 소부장 기업 중엔 재미있는 사례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플라스틱 사출성형업체인 ‘주켄’은 100만분의 1g 짜리 기어를 만든 곳입니다. 이 기어의 지름은 0.147mm에 불과합니다. 막상 너무 작아서 사용할 곳도 없는데, 개발비로 2억엔이 들었습니다. 무모한 도전 같아 보였지만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기어를 만든 회사’라는 명성을 얻으며 대학 교수들이 배우러 오는 회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비주류로 출발한 일본의 소부장 기업들은 남들보다 더 작거나 크게, 또는 특별하게 만드는 ‘차별화’를 통해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부품(소부장)을 들여와 완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식의 한일 간 국제분업 체제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들면서 장기간 ‘관행’이자 ‘관성’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일본의 소부장 수출 금지는 이러한 ‘관성’에 물리적 변화를 가져오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변화는 시작되었고 관건은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 기업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냐입니다.
저자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달라진 산업 환경, 한미 간 공조를 통한 일부 첨단 기술 분야에서의 일본 추월 등으로 인해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는 한국에는 오히려 기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자동차 부품은 대일 무역에서 만성적인 적자를 기록했던 대표적인 분야입니다. 하지만 정부 지원과 품질 향상 노력 등을 통해 대일 의존도를 꾸준히 낮춰왔고, 2010년 이후엔 적자 규모를 크게 줄일 수 있었습니다.
일본 또한 대지진 이후 특정 업체에 특정 부품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관행을 바꿔 아시아로부터의 부품 수입을 늘리는 구조 개혁을 단행한 바 있습니다. 대지진이라는 외부의 충격이 관성에 균열을 일으켜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낸 것이죠. 소부장 산업에서도 일본의 수출 금지라는 외부 충격이 “소부장 산업 전반에서 한일 간 역학관계를 바꾸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저자는 전망합니다.
특히 저자는 산업의 트렌드가 다양한 생산공정과 제품에 전자기술을 접목했던 ‘산업의 전자화’에서 전자 기술의 역할을 화학이 대체하는 ‘산업의 화학화’로 넘어가는 시점에 일본이 수출 규제 조치를 내놓은 점에 주목합니다. 이 같은 패러다임 변화 시기에 이뤄진 규제 조치는 오히려 후발 주자가 선발 주자를 따라잡는 ‘기회의 창’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이 책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나라 대기업들과 일본 소부장 업체들 간의 국제 공급망 구축 노력을 조망합니다. 실제로 1980년대 초반부터 대우전자와 협력해 온 가전용 모터 제조업체 '스타엔지니어링', 삼성전자와의 협력을 계기로 글로벌화에 나선 코일 권선업체 '니토쿠엔지니어링' 등 자국에서 인정 받지 못했던 일본 소부장 기업들에게 대한민국 대기업들은 든든한 후원군이 되어주었습니다.
이에 저자는 일본의 수출 규제로 인해 “일본 소부장 기업들은 한국 대기업이라는 든든한 원군을 잃게 된 것은 아닐까”라고 반문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단락은 일본의 수많은 소부장 기업들의 흥망성쇠 사례를 제시하며 정책 수립과 기업 경영에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흥미로운 사례들이 많습니다.
일본 '소형재 산업'은 우리나라의 ‘뿌리산업’에 해당합니다. ‘고이도우공업’을 비롯해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온 30여 곳의 일본 주조기업들은 과거엔 주로 불상을 만들던 곳인데 전쟁 중에는 무기 관련 부품을, 패전 후에는 전자 부품과 자동차 부품 등을 생산하는 곳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장인의 감각에 의존해온 생산공정에 IT를 결합해 공정을 표준화하는 식으로 달라진 환경에 적응했기 때문입니다.
‘오타공업단지’는 절삭, 연마, 소성가공 등 특정 분야에 특화된 기술을 갖춘 소규모 기업들이 모여있는 ‘뿌리산업 클러스터’입니다. 이곳에서는 공장들끼리 팀을 꾸려 절삭은 A업체, 연마는 B업체가 맡는 식으로 협업해 완성도 높은 제품을 납품한다고 합니다. 이런 시스템을 이웃 동료를 의미하는 ‘나카마’와 전달한다는 의미의 ‘마와시’를 붙여 ‘나카마 마와시’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국내에서도 참고할 만한 협업 모델인 듯합니다.
일본 금형계의 에디슨으로 불리는 ‘다케우치 히로시’는 이공계 교수와 현장 기술자들이 의견을 교환하던 커뮤니티를 ‘아이디어 공방’이란 공동조합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이곳에선 누군가 아이디어를 내면 제품으로 만들어주는데, 아이디어만 있는 발명가와 기술은 있지만 뭘 만들어야 할지 모르는 중소기업이 만나 시너지를 내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 외에도 텐트 업체로 출발해 돔구장에 사용되는 ‘돔’에 특화해 세계 1위에 오른 ‘타이요공업’, F1 레이서를 공략해 성공을 거둔 ‘아라이 헬멧’, 1만종에 달하는 베어링을 생산하면서 소량 발주만 받는 대신 탁월한 재고관리를 바탕으로 세계시장 점유율 70%를 차지한 ‘기타니혼정기’ 등 남다른 기술과 아이디어로 무장한 일본 소부장 기업들의 사례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와 일본 산업의 종속적인 관계를 빗대 ‘가마우지 경제’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기업이 만든 수출품에 사용된 주요 부품 상당수가 일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수출이 늘어날수록 대일 의존도 또한 높아지는 종속적인 환경을 가리킵니다.
우리 정부는 지난 2019년 소부장 경쟁력 강화 대책을 발표하면서 국내 소부장 산업을 ‘펠리컨 경제’로 바꿔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부리 안에 먹이를 저장해두는 펠리컨처럼 국내 소부장 산업의 자립도를 높이겠다는 의미입니다.
‘지일극일’(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이라는 저자의 소신처럼, 이 책은 우리 경제가 가마우지를 벗어나 펠리컨이 되기 위한 지침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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