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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제조업 혁명-②] 제조의 디지털화, DIY를 '메이커스'로

2021/07/20

앞선 글에서 소개했듯이 <3DP 특허 만료, 서서히 판을 흔들다> 참조 2000년대 들어 3D 프린팅 기술의 특허가 만료되면서 그동안 특정 회사만 사용할 수 있었던 3D 프린팅 기술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D 프린팅은 남들과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제품을 갖고 싶어하는 개인에게는 몹시 매력적인 기술입니다. 기존 제조업이 단가를 낮추기 위해 소품종 대량생산 방식을 선호하는 데 비해, 디자인을 바꾸는 데 추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3D 프린팅은 다품종 소량생산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3D 프린팅 기술의 ‘개방’은 더 많은 일반인들이 제조(manufacturing)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이 즈음 인터넷의 확산으로 그동안 자신의 집 마당이나 차고에서 각자도생 식으로 ‘DIY(Do It Yourself)’ 제조에 탐닉했던 개인들이 온라인에서 서로 연결되면서 각자의 지식을 나누고 협동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제반 환경의 변화는 메이커스 운동(Makers Movement)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게 됩니다. 

DIY의 진화, ‘메이커스 운동’

3D 프린팅에 대한 첫 번째 특허가 풀릴 무렵인 지난 2005년, 미국의 미디어그룹인 오라일리(O’Reilly)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물건을 만들고 싶어하는 이들을 겨냥해 <Make>라는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특히 이 잡지를 발행하는 메이커 미디어는 잡지만 발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큰 이벤트를 기획했습니다. 바로 이듬해부터 열린 ‘메이커 페어(Maker Faire)’라는 메이커들을 위한 행사입니다. 메이커 미디어는 이같은 시도를 통해 ‘메이커스 운동’을 선도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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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방콕에서 열린 '메이커 페어' 행사.

메이커 페어에는 평소 제조에 관심이 많던 일반인들이 자신이 직접 만든 자동차나 기계 등 특색 있는 작품을 들고 참가했습니다. 특이한 볼거리를 제공한 메이커 페어는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미국을 넘어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세계 40여개국으로 확산되기에 이릅니다.

메이커스 운동의 열기가 최고조에 이르던 지난 2014년엔 사상 처음으로 백악관에서 메이커 페어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조업을 국내로 회귀시키자’는 ‘리쇼어링’ 정책을 표방했던 오바마 정부 입장에서도 제조업에 대한 일반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는 메이커 페어는 미국 제조업의 부흥을 홍보하는 좋은 수단이었습니다. 

백악관은 메어커 페어 개최를 홍보하면서 “최근 몇 년 사이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3D 프린터나 레이저 커터, 사용하기 쉬운 디자인 소프트웨어 등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며 “’메이커 운동’의 부상은 (제조업 분야에서) 미국에 커다란 기회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습니다. 

백악관이 언급했듯, ‘메이커 운동’의 확산에는 이전까지 기업이나 전문가들만 사용할 수 있었던 3D 프린터를 비롯한 최신 기술에 개인이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3D 프린팅 기술 특허 만료도 한 몫 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그들만의 리그'로 인식되던 제조 분야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결국 '디지털'이라는 시대의 흐름이었습니다.

변화의 쌍두마차, '디지털 제조'와 '피지컬 컴퓨팅'

<롱테일의 법칙>, <프리(Free)> 등을 쓴 IT 분야 베스트셀러 저자인 크리스 앤더슨은 지난 2012년에 출간한 저서 <메이커스(Makers)>를 통해 “거대 제조업은 전문지식, 설비, 투자가 필요하기에 주로 대기업과 전문 인력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지금 바뀌려 하고 있다”며 그 이유를 “제조의 디지털화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실제로 그동안 일부 전문가들만 접근할 수 있었던 제조 기술이 ‘오픈 소스’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면서 누구든지 전문기술을 따라 배우기가 쉽게 되었습니다. 특 컴퓨터에서 작업한 제품 디자인이 디지털 파일로 저장돼 온라인에서 공유되었고, 구체적인 기술을 모르더라도 자기집 컴퓨터에서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이런 ‘파일’만 내려받으면 누구나 쉽게 해당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조의 디지털화가 제조의 ‘민주화’를 불러온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아두이노’를 비롯한 오픈 소스 기반 범용 보드의 등장은 디지털 제조를 통해 만든 물건에 '생명력'을 부여했습니다. 하나의 기판에 마이크로컨트롤러가 부착된 형태의 보드를 이용해 집에 있는 컴퓨터를 갖고도 하드웨어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피지컬 컴퓨팅(physical computing)'이 가능해진 것이죠.

특히 아두이노, 라즈베리 파이 등 다양한 보드들 사이에도 경쟁이 붙었고, 새롭게 개발된 소스 코드들은 곧바로 공유됐습니다. 과거 재야의 제조 고수들이 자기 집 마당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DIY 방식의 사제품(私製品)을 만들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시간에 혁신이 이뤄졌습니다. 특히 아두이노 등은 3D 프린터를 만드는 데에도 사용되면서 3D 프린터의 ‘대중화’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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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 컴퓨팅'에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아두이노' 보드 이미지.

'대중에게 3D 프린터를!' 렙랩과 메이커봇

영국 배스 대학 기계공학과의 에이드리언 보이어(Adrian Bowyer) 교수는 자신의 부품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이론상 무한 복제가 가능해지는 것이죠. 

그러던 차에 대학에서 정부 보조금으로 구입한 3D 프린터를 구입하게 됩니다. 보이어 교수는 이 프린터를 갖고 3D 프린터의 부품을 생산하기로 합니다. 스스로를 복제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겠다는 렙랩(RepRap, Replicating Rapid Prototyper의 준말) 프로젝트의 출범입니다. 보이어 교수는 자신의 작업 과정과 설계 정보를 누구나 참고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오픈 소스’로 모두 공개했습니다.

보이어 교수의 이와 같은 ‘렙랩’ 정신은 대중이 사용할 수 있는 값싼 3D 프린터를 생산하려는 시도로 이어집니다. 지난 2009년 뉴욕 브루클린에 설립된 ‘메이커봇’은 보급용 3D 프린터 제작에 나서면서 역시 관련 기술과 디자인을 모두 온라인에 공개했습니다. 

이들은 아예 씽기버스(Thingiverse)라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이곳에 3D 프린터 제작에 필요한 디자인 파일을 공유했습니다. (*메이커봇은 지난 2013년 씽기버스와 함께 거대 3D 프린터 제조업체 ‘스트라타시스’에 인수됐습니다.) 

개인이 직접 소유할 수 있는 3D 프린터의 보급으로 그동안 대규모 자본을 보유한 기업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제조'는 개인의 영역으로 한발 더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을 필두로 3D 프린터, 레이저 커터 같은 전문 장비들을 지역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팹랩(FabLab)메이커스페이스(makerspace)가 속속 생겨나면서 값비싼 제조 장비를 개인이 이용할 기회가 갈수록 늘어났습니다.

온라인에서는 자신이 개발한 제품이나 기술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 활동이 활성화됐습니다. 이처럼 기술이 생겨나고 그 기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개인의 취미 활동은 '산업'으로 발전할 조짐을 보이게 됩니다. 

'10년간 10억명 영향 줄 서비스를 디자인하라'

미국에서 메이커스 운동이 한창이던 지난 2010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클라라에 위치한 싱귤래리티 대학(Singularity University)에는 전세계 35개국에서 온 학생들과 교수진, 기업가들이 모인 가운데 10주간의 교과 과정이 시작됐습니다.

구글의 창업자 래리 페이지가 축사를 했고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교수, 우주왕복선을 세 차례나 탑승했던 전직 우주인 등이 강사로 참여했습니다. 1600명의 지원자 가운데 선발된 80명 학생들의 이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명문대 박사과정 학생부터 변호사, 이미 수 차례 창업에 성공한 20대 백만장자 등 화려하고도 다채로웠습니다.

학생들은 처음 4주간은 최첨단 학문에 대해 공부하고, 이후 실리콘밸리 소재 회사들을 방문하며 기술이 실제로 어떻게 현장에서 구현되는지 지켜봤습니다. 특히 팀별 프로젝트 과제도 주어졌는데, 요지는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을 활용해 앞으로 10년간 10억명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디자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학생 중엔 2명의 한국인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의 유엔 우주사무국에서 근무했던 유영석(암호화폐 거래소 코빗 창업자)씨와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으로 선발됐던 고산(현 에이팀벤처스 대표)씨였습니다. 두 사람의 관심사는 사뭇 달랐습니다. 미래를 선도할 첨단 기술 가운데 한 명은 블록체인에, 다른 한 명은 3D 프린터에 주목한 것입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2011년 청년 창업을 지원하는 비영리 법인인 '타이드 인스티튜트(Tide Institute)'를 함께 설립했습니다. 타이드 인스티튜트는 2013년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에 ‘팹랩(FabLap)’을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미얀마, 라오스 등에도 진출하며 시제품 제작과 예비 창업가들의 제조업 창업 등을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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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법인 '타이드 인스티튜트'가 지난 2013년 종로 세운상가에 세운 '팹랩' 서울.

특히, 3D 프린팅에 관심이 많았던 고산 대표는 2014년 에이팀벤처스를 설립하고 국산 3D 프린터 제조에 뛰어들었습니다. 또 3D 프린터를 가진 사람과 3D 프린터가 필요한 사람을 연결해주는 서비스인 ‘쉐이프엔진’을 출시하며 제조업 시장 개척에 나섰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3D 프린터가 조만간 기존 제조 산업을 크게 바꿔놓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생각보다 더뎠고, 3D 프린팅의 활용은 산업 전반으로 확대되기 보다는 여전히 상당 부분 개인의 취미나 시제품 제작 등에 머물렀습니다.

대신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존의 제조 산업을 혁신시키려는 시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속도는 생각만큼 빠르지 않았지만 변화를 향한 움직임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다음 편 제조업 플랫폼의 시대가 열리다에서 계속>

“이제 중요한 것은 생산수단의 소유권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임차권이다.”


에릭 리스, <린 스타트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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